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4차 십자군 원정 (문단 편집) === 자금난 === 그러나 약속한 날짜인 1202년 6월이 되어도 집결한 병력이 부족하자 문제가 되었다. 원정군 전체의 규모가 줄어든 것은 물론, 수송비를 십자군 영주들 각각이 내는 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10월이 되기까지 십자군 지휘부는 집결을 기다렸는데, 그럼에도 당초 '''예정의 절반에 못 미치는''' 1만 2천여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협상 당시 허세를 부려서인지 실제로 영주들의 사정이 악화 되었던지 간에 전체적으로 비협조적인 분위기로 인해 병력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 운송사업에 거의 국운을 걸다시피 준비를 했다. 1201년 4월에 십자군과 채결한 협정에 의하면 베네치아가 준비해야하는 선단은 화물 수송선(군마 4,500필, 종자 9천명) 및 범선(기사 4,500명 및 보병 2만명) 외에 추가로 베네치아 정부의 비용으로 운영하는 5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되었다. 선단의 구체적인 규모는 정확한 사료가 없어 조금씩 추산이 달라지나 최소 200척에서 480척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이게 어느정도의 규모냐면 이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추진한 7, 8차 십자군 당시 준비된 수송선단이 각각 36척, 39척 정도이다. 베네치아가 준비한 선단에는 선원'''만''' 1만 4천 명이 필요한데 이 수치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성인 남성의 반에 해당되었다. 선단을 꾸리는 작업은 베네치아의 재정 및 상업 활동 전체를 1년 이상 동결시켜야하는 엄청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공화국의 지도자인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선박의 상업활동을 18개월 간 중단시키는 한편 해외에 나가있는 선박을 귀환시켰다.[* 실제로 1204년에서 1205년까지 베네치아의 해외 상업 활동에 관한 사료는 유달리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여기에 십자군과 선원을 먹여살릴 식량 조달 등 부수적인 간접 비용까지 고려했을 때 사업이 나가리 된다면 '''베네치아의 국운이 휘청거릴 판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병력 집결이 당초 계획보다 저조하면서 출항이 기약도 없이 지지부진해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손해는 눈덩이 마냥 불어났고 지도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장 초창기 프랑크군이 운송비 대금으로 요구받은 금액은 84000 쾰른 마르크였다. 이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 왕실 수입의 '''2배에 해당되는'''[* D.E.Queller & T.F.Madden, ''The Fourth Cursade'', pp.222]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병력 집결이 지지부진하여 십자군은 자산을 파는 등 돈을 쥐어짰으나 5만 1천여 마르크밖에 모으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십자군 측은 예루살렘은 커녕 출항 한번 해보기도 전에 [[병림픽|파산으로 해산될 위기에 처했다.]] 베네치아와 십자군 둘 다 궁지에 몰린 이런 기막힌 상황 속에서 베네치아 측은 8월경 십자군에 타개책을 제안하게 된다. '''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바로 다른 기독교 국가들을 약탈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